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지강유철의 음악정담(10)

출처: http://fzari.com/198

나이든 송창식의 노래

 

2007년에 월간 <인물과 사상>이란 잡지에 ‘송창식이 클래식이다’란 글을 기고한 일이 있습니다. 그로부터 몇 개월 후 2년 동안 한국에 머물던 서경식 선생이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메조 소프라노인 아내를 위해 연주회를 열었습니다. 철학자 김상봉 선생이 사회를 보았는데 슈만의 연가곡 ‘여인의 생애와 사랑’이 주 레퍼토리로 꾸며진 무대였습니다. 연주회 형식을 갖췄지만 그 동안 고마웠던 지인들을 초청한 자리였습니다. 공연장 앞에서 차병직 변호사를 만났습니다. 김두식 교수와 한 차례 동석을 한 게 전부였는데 먼저 다가와 ‘송창식이 클래식이다’란 글을 잘 읽었다고 인사를 건네주더군요. 은퇴 후에 송창식 평전을 써보고 싶다는 이야기와 함께 말입니다.

 

차병직의 송창식과의 관계는 대학생 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차 변호사가 소장하고 있는 오디오를 송창식이 주었다면 두 분의 관계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갑니다. 몇 년 전 세시봉이 떴을 때 차병직 변호사는 함께 송창식과 함께 레퍼토리를 고르고 일부 지방 연주회는 함께 다녔습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차병직 변호사를 양화진 목요강좌에 모실 수 있었습니다. 꼭 그 때문은 아니지만, 작년에는 송창식도 함춘호와 함께 양화진 음악회에 섰습니다. 감동적인 무대로 남은 연주회였습니다. 왜 작년의 양화진 음악회에서 송창식의 무대가 감동이었는지에 대해서는 결론에 쓰기로 하고, 기본적인 생각에는 변함이 없기 때문에 7년 전의 원고를 약간 수정해서 먼저 올리는 것에 미리 양해를 구합니다.

 

 

 

그때 왜 그랬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만 중학교를 다니던 한 때 나훈아를 좋아했습니다. 소장수 아버지를 두었던 응춘이란 친구 때문이었지 싶습니다. 그의 집에는 당시 최고의 문화 히트 상품이던 야외전축이 있었거든요. 지금은 가사도 제목도 모두 잊었지만 친구와 나훈아의 노래를 야외전축에 걸어놓고 따라 불렀던 기억이 납니다. 나훈아가 관심에서 멀어진 건 통기타를 배우면서부터입니다. 양희은, 조영남, 김세환, 윤형주, 김정호, 송창식 등이 부르는 포크송에 빠져들었지요. 그 시절이 떠오르면 한 때나마 나훈아를 좋아했었다는 사실이 약간 당황스럽습니다. 사춘기의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내 미감이 그의 트로트를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유치한 자기 합리화를 시도했습니다. “나는 나훈아를 좋아했던 게 아니라 엘비스 프레슬리의 원색적인 천박한 몸짓 덕분에 인기를 얻었던 그의 영원한 라이벌 남진을 싫어했던 것”이라고 말입니다.

 

대중가수 콘서트를 처음 관람한 것은 2005년 어버이날에 딸아이가 사준 티켓으로 구경한 양희은의 무대였습니다. 그로부터 꼭 1년 뒤에 송창식, 김세환, 윤형주가 함께 출연하는 콘서트를 관람했습니다. 올림픽공원 펜싱경기장에서 열렸던 ‘신세대 부모님들을 위한 효 콘서트 <2006 포크 빅3> 공연이었는데요. 2년 사이에 젊은 날의 우상 네 명의 음악을 모두 접했습니다. 두 번에 걸친 포크송 대가들의 공연은, 자녀들로부터 효도의 뜻으로 받은 공연에 참석할 만큼 내가 늙었다는 사실과 공연장을 가득 메운 관객이 50대 이상의 ‘노땅’들이라는 것이 주는 어색함을 제외한다면 유쾌했습니다.

제 눈길을 사로잡았던 가수는 송창식이었습니다. 양희은과 양희경이 풀어내는 감동적인 가족 스토리에도 불구하고 공연 후반부로 가면서 노래의 완성도가 다소 떨어졌던 게 아쉬웠고, 그런 아쉬움은 윤형주나 김세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송창식은 달랐습니다. 세 번째 스테이지에 등장한 그의 사운드는 공연장을 일순간 바꿔놓았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관객을 들었다 놓았다 했고, 그가 만들어 내는 음악은 절정을 향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내달리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반면에 양희은, 김세환, 윤형주가 좋은 가수란 사실을 부정할 순 없었지만 그들의 목소리와 음악적 표현엔 어쩔 수 없는 나이의 흔적이 어른거렸습니다. 클래식이든 가요든 음정을 떨어뜨리지 않는 것은 음악의 기본 중 기본입니다. 다른 게 다 되어도 그게 안 되면 대책이 없습니다. 녹음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그건 커버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송창식의 열창을 들으면서, 80년대 후반 TV를 통하여 우연히 보았던 그의 콘서트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그때도 그의 노래는 청중을 압도했습니다. 대중가수가 저토록 심오할 수도 있구나 싶었거든요. 당시 클래식계에서는 지휘자 번스타인이 피아노 연주와 작곡, 그리고 지휘에서 보이는 천재성을 말하며 그가 100-200년 전 태어났다면 충분히 우리가 익히 아는 쇼팽이나 리스트 같은 인물이 됐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회자되었거든요. 때문에 송창식의 노래를 들으면서 생각했습니다. “만약 송창식이 클래식을 전공했다면 정명훈이나 백건우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송창식은 클래식으로 음악 인생을 시작했습니다. 인천중학교를 다닐 때 별명이 모차르트였고, 3학년 때는 경기음악콩쿠르 성악부분에서 1등을 차지했습니다. 어른들이 당시 명문이었던 제물포고등학교에 보내고 싶어 할 만큼 공부를 잘했지만 송창식은 성악을 전공하기 위해 서울예고에 들어갔습니다. 지독한 가난 때문에 예고를 중도 포기해야 했으나 그의 데뷔무대로 기록되는 무교동의 음악 감상실 세시봉에서 송창식이 불렀던 노래는 도니체티의 오페라 <사랑의 묘약>에 나오는 ‘남몰래 흐르는 눈물’이었습니다. 윤형주와 결성한 트윈폴리오의 인기가 상종가를 칠 때, 송창식은 돌연 팀을 해체했습니다. 우리의 소리를 찾기 위해 음계, 소리, 화성학 체계를 비롯한 음악 전반을 다시 공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첫 결실이 ‘나는 피리 부는 사나이’였다는 사실은 모두가 아는 얘기입니다.

 

송창식을 좋아하는 이유를 그의 클래식과의 연관성으로만 돌릴 수는 없습니다. 그의 ‘왜 불러’나 ‘고래사냥’이 독재정권에 의해 한 때 금지곡으로 묶였고, 그로 인해 대학생들이 유신시대에 대한 저항의 찬가로 그의 노래를 즐겨 불렀다는 사실도 내가 그를 좋아한 결정적 이유는 되지 못합니다. 박정희 정권의 말기였던 1978년에 불순분자에 다름 아니었던 김민기에게 대뜸 연습실을 내주는 위험을 무릅썼던 것도 멋지지만 그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송창식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노래를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의 일환으로 즐겨 불렀다는 사실을 알면서, 그리고 그것이 미덕이 되는 시대를 살면서도 자기 곡이나 가사에 의식적으로 저항성을 담지 않았노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 인간됨 때문에 송창식에 끌렸던 것입니다.

 

송창식은 김민기 같은 “브람스 수준의 천재”가 저항가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하였음을 못내 안타까워했습니다. 지금과 달리 포크송 가수나 그들의 팬들, 그리고 국악계가 트로트를 천박하다고 괄시할 때, 트로트 가수 김연자에게 ‘당신은’ ‘안 돼’ 같은 곡을 주었고, 자신이 부른 ‘토함산’이나 ‘나는 피리 부는 사나이’가 트로트를 만들기 위한 곡이었다고 당당하게 털어놓았던 송창식을 기억하는 일도 즐겁습니다.

만약 거기서 끝이었다면 송창식은 좋아하는 가수로 머물렀을 것입니다. 그에게 존경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아깝지 않은 건 예술가로서의 그의 태도 때문입니다. 소위 장인 정신 말입니다. 임진모가 잘 지적했듯 송창식은 “언제나 음악의 근원을 면밀히 탐구”한 음악가입니다. 송창식은 어설프게 1970년대라는 시대에 맞서거나 개입하는 방식을 선택하지 않고 나름대로 음악의 근원을 사유했던 것입니다. 그의 또 다른 음악적 태도는 냉혹할 정도의 자기 관리입니다.

 

그의 음악 인생 중에서 앨범을 홍보해 주겠다는 TV 출연 섭외를 거절했던 에피소드는 흔합니다. 오전 5시 취침하여 오후 2-3시에 기상하고, 기를 통하여 자기 몸을 단련하는 일은 젊은 시절부터 지금까지 누구도 끼어들 수 없는 삶의 원칙 중 하나라고 합니다. 그는 꽤 오랜 기간 동안 독주 음반을 내지 않고 칩거하는 동안 1000여 곡을 썼지만, 때문에 자신만 마음을 먹으면 앨범을 내주겠다는 음반사는 줄을 섰지만 그 제안을 모두 뿌리쳤습니다. 음악의 완성도가 담보되지 않는 한 가수로서의 인기나 음반을 통한 이윤은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는 얘기입니다.

 

 

 

작년 5월의 양화진 음악회는 송창식을 위한 무대로 꾸밀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혼자 90분 이상은 무리라는 가수의 의견을 존중해서 남성 보컬 ‘길구 봉구’의 멤버 봉구 씨와 박용준 키보디스트가 함께 출연을 했습니다. 양화진의 근사한 야경과 함께 꾸며진 야외무대에서 노래하는 송창식을 보면서, 만약 글쟁이들이 오늘 공연을 본다면 2000명이 훨씬 넘는 사람들을 쥐고 흔든 송창식의 연주와 자신의 글을 비교했지 싶습니다.

 

글과 노래의 영향력을 단순 비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귀에 익숙한 송창식의 ‘고래사냥’, ‘왜불러’, ‘우리는’ 등의 노래가 시작되자 관람객은 열광했습니다. 무대와 객석이 하나 되는 이런 일체감은 정말 짜릿합니다.

 

송창식의 노래에도 나이의 그림자는 어른 거렸습니다. 그러나 청중을 압도하는 카리스마는 녹슬기는커녕 계속 진화하고 있단 인상을 받았습니다. 압도하는 연주력과 해학으로 나이를 스스로 빛나게 만드는 송창식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관람객이 수십 년 전부터 익히 알고 있던 노래를 단순히 녹음기 틀어놓듯 반복했다면 저런 열광이 가능했을까 싶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송창식의 노래는 제가 이제까지 들은 것 중 최고였습니다.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전 국민이 다 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자신의 노래 멜로디 라인을 스스로 허문 것입니다. 가사는 그대로인데 노래의 가락과 리듬은 붕괴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을 만큼 단순화되고 있었습니다. 가령 멜로디가 계이름으로 ‘미파솔라’로 이어지는 멜로디에서 중간에 있는 ‘파솔’을 생략하고 노래를 부르더란 것입니다.

 

일부 송창식 마니아들은 그렇게 생략되는 멜로디를 좋아 하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제겐 뼈만 앙상한 그의 멜로디 라인에서 깊어지는 그의 인생과 함께 예술성이 죽지 않았음을 동시에 느꼈습니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말년의 양식>에 등장하는 베토벤이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자신이 완성한 최고의 형식을 스스로 해체하듯 말입니다. 혹시 송창식은 젊었을 때 부렸던 겉 멋 내지 덜어내지 못한 욕망과 저렇게 이별을 고하고 있던 것일까요. 평생 구축한 자신의 멜로디 라인을 허물며 비상하는 가수라니! 이런 예술가 앞에서 음악의 장르가 뭔 대수겠습니까. 그의 노래를 들으면서 나이 들어가는 공포로부터 조금은 벗어났다고 말한다면 오버일까요?

 

지강유철/양화진문화원 선임연구원, 《장기려, 그 사람 저자》

 

신고
Posted by 팬더54

댓글을 달아 주세요



티스토리 툴바